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지레 클라리 (문단 편집) === 왕비 === [[1818년]], [[칼 13세]]가 승하하자 남편 [[칼 14세 요한]]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데시데리아도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비가 되었다. 데시데리아 왕비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머물렀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과 데시데리아의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대신 돌아온 프랑스의 귀족들과 [[영국]] 등 여러 외교관 부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특히 영국 대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무척 친하게 지냈고, 그것을 계기로 데시데리아가 영국 대사관에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국왕으로 즉위한 남편은 데시데리아에게 그만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주저한다. 언니 줄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그러지도 못했고[* 당시 스웨덴에서는 반 나폴레옹 성향이 강해서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이었던 줄리 클라리를 스웨덴으로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당시 데시데리아의 생각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차있었다. 리슐리외 공작 아르망 디 플레시에게 반해 그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리슐리외 공작은 데시데리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나의 미친 여왕이라고 불렀다. 이 모든 것을 보고받은 [[칼 14세 요한]]은 화를 내며 당장 돌아오라고 했지만 데시데리아는 '건강상의 이유'로 파리에 머물렀다. 1년 후 리슐리외 공작은 사망했고 데시데리아는 매우 슬퍼하며 공작의 초상화를 간직한다. 1822년 독일의 아헨에서 11년만에 아들 [[오스카르 1세|오스카르 왕세자]]를 만났다. 멋지게 장성해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왕자로 불리던 오스카르는 신부감을 찾기 위해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오스카르와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공녀]]의[* 나폴레옹의 전처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손녀로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장녀.] 결혼이 결정되었고 데시데리아 왕비는 며느리가 될 조제핀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기로 한다. 데시데리아는 남편에게 '짧은 방문'을 할까 한다고 편지를 썼다. 1823년 7월 13일 며느리와 함께 스톡홀름에 도착한 데시데리아 왕비는 스웨덴 여름의 음침하지 않은 날씨와 매우 밝은 분위기 속에서 대체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느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데시데리아 왕비가 입성하면서 스웨덴 궁정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스웨덴 궁정은 왕실 여성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군인들로만 이루어지는 참모 회의'''''같은 분위기가 강했다. 남편 칼 14세 요한은 데시데리아의 부재와 정치적 목적 때문에 선왕의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데시데리아 왕비와 [[조제핀 드 로이히텐베르크|요세피나 왕세자비]]가 있던 스웨덴의 궁정은 [[구스타브 3세]] 이후에 가장 활기찼다고 한다. [[파일:198x_OIIS_Talvor_129.jpg]] [[1829년]], 데시데리아는 남편 [[칼 14세 요한]]에 의해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왕비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원래 스웨덴의 대관식은 국왕과 왕비가 함께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남편의 대관식 때 데시데리아는 프랑스에 있었고 평민 출신이기에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가톨릭 종교 때문에 노르웨이 대관식은 하지 못 했다. 칼 14세 요한과 데시데리아 부부는 스웨덴에서 적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데시데리아는 모국인 프랑스로 매우 돌아가고 싶어했다. 당시 데시데리아는 스웨덴으로 떠날 때 프랑스에 있던 집과 사업체를 두고 떠나면서 언니와 조카에게 이를 유지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여러 번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지만 때로는 남편의 만류로 때로는 뱃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매번 취소되었다. 데시데리아 왕비는 궁정에 있는 자신의 살롱에서 측근들과 교류했다.[* 데시데리아는 [[스웨덴어]]를 잘 몰랐지만 프랑스 출신이었고 당연히 언어는 데시데리아의 모국어이자 당대 상류층들의 교양어였던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과 정치의 대한 무관심, 오랜 부재 등으로 인해 스웨덴의 왕비로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